"이완용이 죽자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졌다"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입력 2023-08-22 18:10   수정 2023-11-14 17:05



딸이 어릴 적, 대화를 나누다 이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딸은 이완용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도대체 학교에서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매국노 이완용을 모르냐고 야단을 쳤다. 이 일 이후 딸이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태반이 이완용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빠에게 야단맞은 것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이완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부끄러운 과거, 수치의 역사야말로 미래를 창조적으로 빚을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1926년에 공중화장실이 깨끗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화장실의 주된 낙서가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자는 내용이어서 욕할 대상이 사라지자 낙서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필경은 붙들려 갔다. 겹겹이 있는 순사의 파수와 돈과 폐물 벽의 견고한 보호막도 저승사자의 들이닥침을 어찌하지 못했다…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이다.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1926년 2월 13일)라는 사설을 실었다. 일제 치하에서 총독부가 이완용을 지키고 감쌌더라도 민족의 배신자인 그에게 쏟아지는 감정의 분출은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이완용이 중림동에 살았었다.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자료를 종합해보면 지금의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주변이다. 그 앞의 몇몇 허름한 한옥자리가 이완용의 집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이완용은 우봉(牛峰) 이씨로 태어난 곳은 경기도 판교이다. 자녀가 없는 먼 친척인 이호준의 집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준은 처세술의 달인으로 고종 휘하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이완용은 양부를 따라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인 안국동의 저택에서 살았다. 헌법재판소 경내의 많은 표지석들이 증명하듯, 당시 힘 있는 양반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박지원, 홍대용, 윤웅렬, 풍양조씨 등.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이완용은 집을 나온다. 아버지가 그의 집과 막대한 재산을 서자 이윤용에게 물려 주었기 때문이다. 첩의 자식이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그러나 가문의 제사는 양자인 적자, 이완용이 모시게 했다. 이완용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양자와 서자의 사이가 좋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는 고래등 같은 집을 나와 이곳 중림동에 작은 집 한 채를 얻었다. 중림동에는 조선시대에 참수장이 있었고, 성문 밖이라 정국의 실력자인 이완용이 살기에는 초라한 동네였으나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덕수궁의 옛 명칭)이 인근에 있어 출근이 편했다. 중림동 언덕에서 바라보면 남산에서 이어진 한양도성이 그림처럼 산등성이에 따라 드리워져 있고 인왕산에서 발원한 만초천이 도성을 휘감아 흐르고 있었다.

충정공 민영환의 별서(별장)도 지금의 프랑스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전편에서 소개한 이하영 대감이 고무신 공장을 차리기 전에 이미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07년에 이하영 대감이 이 근방에 있던 자신의 별서를 사립학교인 ’소의학교‘에 기증했다는 자료도 보인다. 1890년생인 이하영의 아들 이규원의 본적이 중림동으로 돼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하영은 이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하영이 이완용에게 이 동네를 소개했을 개연성도 크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동갑내기 말띠 1858년생이다.

당시 두 사람은 영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엘리트였다. 미국에도 여러번 동행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성난 민심이 두려워 알렌의 집에 숨는다. 알렌의 요리사였던 이하영의 주선이 있었을 것이다. 늦게 정치에 입문한 이하영은 이완용의 정치적 궤적을 뒤따른다. 이완용이 1등 서기관으로 미국에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함께했고 이완용의 뒤를 이어 외무대신을 했다. 이하영은 이완용에게 수시로 정치적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이하영이 이곳에 자리잡을 당시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을 때인데 성문 밖 첫 동네, 이곳에 살아보니 직장(경운궁)도 가깝고 전원의 풍광도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마음 편히 한 곳에 정착하기 어려웠다. 그가 이곳에 살았을 때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근대 역사에서 백성들의 울분이 최고조일 때는 나라 잃은 1910년이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부터 정미조약이 일어난 1907년까지이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외교권 박탈, 고종의 폐위, 군대 해산을 차례로 진행한 시기이다.

그 즈음 중림동으로 이사한 이완용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07년은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된 해이다. 중림동은 남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서소문 중앙일보의 붉은색 대리석 건물 앞에는 박승환 참령의 자결터가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고 그를 따르던 군인들이 탄약고에서 총과 탄환을 탈취해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다. 소위 남대문 전투이다.


이후 군인들은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이 된다. 이때가 1907년 8월이다. 전 달인 7월에는 일제의 겁박으로 순종에게로의 강제 양위식이 경운궁에서 열렸다. 고종마저 왕위에서 쫓겨나자, 성난 백성들은 덕수궁에서 멀지 않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갔다.
강제 양위식으로 이완용이 집을 비운 사이 백성들은 가재 도구와 그의 전 재산에 불을 붙였다. 부지깽이로 뒤적거리며 남은 것까지 모두 태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분노가 지금도 느껴진다. 집안의 장자로서 제사를 모셔야 할 조상들의 신주까지 몽땅 타버리자 이완용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문 밖 첫 동네에서 약 12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일을 기억해야 하는데.. 백성들이 왜 그의 집을 불살랐는지 기억해야 하는데…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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